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문단 편집) === 합법 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의 사실상 불법화 === 조선공산당은 이 사건 이전에는 [[일본공산당]] 같은 합법정당이자 현대로 치면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과 비슷한 위치의 최대 정당으로 수많은 당원과 조직이 가입했다. 조선공산당은 정판사 사건 이전에는 미군정에 협력하여 합법정당이자 최대 정당 지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경성콤그룹]] 출신이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서열 12위로 높은 지위였던 [[이순금]]이 "회의 분위기가 너무 극좌로 흐른 것은 앞으로 극복이 되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라며 [[극좌]] 노선을 피하자고 건의한 기록도 있다.[[https://blog.naver.com/kimiusa/221209836298|#]] 그러나 정판사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의 이미지를 악화시킨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을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 있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신문은 뚝섬 위폐 사건과 정판사 사건을 구분하지 않고 조선공산당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에 맞서 [[이순금]], [[박진홍(독립운동가)|박진홍]], 이위상, 정태식은 [[이관술]]의 고결함을 보여주는 일화를 담은 글을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등 신문에 발표하는데 이 신문들은 폐간당하게 된다. 아래 이위상의 글 "나는 뛰었다"에서 이관술의 검거를 참을 수 없었던 이위상의 심경을 드러낸다. >진정한 애국자 이관술 동지가 검거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뛰었다. 이관술 동지를 처음 맞난 것은 1939년이라고 기억된다. 처음 동지를 맞났을 때에 받은 인상은 농군 같은 감을 느꼈든 것이다. 그간 고등교육을 받은 인테리라 함은 세상이 임이 아는 바이지마는 그는 세코 잠뱅이에 등 거리를 입고 밀대 모자를 쓰고 동지를 맞나러 다니는 것을 볼 때 더 한층 놀나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나의 소감을 말하면 이 동지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니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안락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나 농민들의 생활에서 버서나지 않는 기맥킨 생활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가? 그의 조국을 사랑하는 굳은 결심 아래서는 그의 개인의 생활과 명예와 지위를 모조리 희생하는 위대한 증거이다. 진정한 애국자가 아니면 20년간 그러한 생활은 고식(姑息)적 수단으로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다랐다. 이 동지는 항상 동지를 사랑하고 동포를 위하는 마음은 일시라도 잊은 때가 없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망명 생활을 하는 중에도 동지가 곤란한 경우이면 자기가 입은 옷도 버서주고 지갑에 있는 돈을 터러주기를 주저하지 않었으며 이웃집이 밥을 굶으면 자기 밥을 주고 자기는 굶는 분이었다. 1940년 12월 경이었다. 그가 북선에서 활동하다가 서울로 연락을 취하러 왔을 때다. 나와 연락을 취하고 김삼룡 동지와 연락을 취하여 재차 약속을 정하고 다시 찾어 가니 김삼룡 동지는 검거 당하고 말었었다. 그 때 이 동지는 수일간이나 절식불면하고 있었다. 이 동지가 절식불면을 한 것은 사랑하고 지지하든 김 동지를 적에게 빼앗긴 데서 분한 생각과 또 그의 희생이 조선해방에 크나큰 손실이기 때문이었다. > >이러한 점을 볼 때 이 동지는 조선 독립과 동포를 일시라고 잊은 때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동지가 항상 그 지도하에 있는 동지들에게 뼈 속 깊이 교훈하든 말삼이 다시 기억에 새로웁다. “우리 공산주의자는 조선 독립의 주인공이다. 조선 독립을 전취함에 자기 희생을 두려워해서는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항상 격려하였고 “그러기에 우리 공산주의자는 자기 행동을 결백하게 가저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부정한 행동이 있다면 공산주의자 전체가 비난을 받게 되고 따라서 조직을 파괴시키는 것이니 자기 행동은 민중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였으며 그 자신은 완전히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다. > >이에 관해서는 나의 에피소트가 하나 있다. 1941년 1월 8일에 이 동지가 검거된 후 수개월 지난 10월 22일 나는 미아리에서 종로서 고등계 형사에게 잡히어 체포까지 당한 몸으로, 놈들의 눈을 피하여 창을 넘어 도주하여 정릉리 산정으로 올라왔을 그 때 얼골에는 상처가 나고 옷도 찌저지고 수중에는 일분 전이 없었다. 그런데 무엇보다고 급한 것은 옷을 밧구워 입어가지고 도망하는 것이 급선무이지 그대로 있다가는 꼼작없이 부뜰닐 판이였다. 그런데 때마침 골작을 나려다 보니 여름 양복 몇 벌을 빠러서 너러 노흔 것이 눈에 띄웠다. 달녀가 보니 주위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옷은 임이 말나서 그대로 입을 수 있는 정도이었다. 급한 마음에 그것을 바꾸워 입고 도망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이 이러났다. 그러나 그 때 그 순간 이 동지의 진지한 얼골과 준엄한 면모가 나의 안전에 떠올났을 때 나는 자기 생각의 그릇됨을 꾸짖고 그대로 발을 돌려 삼각대(三角 臺)을 거처 홍제외리에 가서 일야를 지낸 일이 있지만 이러한 치밀한 점 까지도 결백 청렴한 우리의 애국자 이관술 동지를 위폐를 만드렀다는 것은 나는 꿈에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 >「진정한 애국자 이관술 동지 검속을 듣고 / 이위상」, 『조선인민보』 1946.7.18. >나는 이 검거의 소식을 듣고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아무리 생각하여도 참말로 들을 수 없다. 해방조선에서 오빠와 같은 애국자를 다시 그 자유를 뺏는다 함은 아무리 하여도 정말 같지 아니하다. 이것은 남매간이라는 사정(私情)에서가 아니요,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전 민족 해방운동을 위하여 특히 근로인민의 이익과 생활향상을 위하여 잔인무도한 일제폭압 밑에서 20년간 개인의 생명과 권위와 가정을 희생하고 지하에서 토막 속에서 감옥 속에서 혈전고투해온 진정한 애국주의자임을 구체적 투쟁 속에서 가장 잘 알며 확실히 인정하기 때문이다. > >오빠 이관술 동지는 1930년대부터 조선민족해방투쟁에 그 몸을 바쳤으니 일제 경찰놈들의 혹독한 총칼이 그의 전신에 집중하였으나 사회에서나 감옥에서나 놈들 앞에서나 민중 속에서나 장소를 불문하고 낮이나 밤이나 일심전력 전민중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여 투쟁하였었다. 그러므로 그의 생활은 반생을 통하여 혁명적이었으며 과감하고 용감하였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진실한 이 애국자의 뒤치다꺼리를 할 때 그 치다꺼리가 확실히 우리민족 해방운동의 한 사업인 것을 매우 만족히 생각하고 항상 기쁨으로 처리하였었다. 이러한 애국자를 민중으로부터 빼앗아감은 무슨 이유인가? 더욱이 추악한 죄명까지 씌워 잡아간다 함이야 꿈엔들 상상할 일인가! >---- >[[이순금]], 오빠 이관술 동지 검거의 소식을 들고서 이 사건을 기화로 당시 우익 성향 단체들은 '공산당이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확신 하에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5월 12일 [[동대문운동장|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 국민대회'를 마친 우익청년들이 수십 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산하 각 단체와 언론부를 공격하기도 했고, 자유신문(해방정국 좌익 계열 신문사)사에 침입해 기계, 의류, 종이를 가져가고 가옥을 파괴하기도 했다. 경성자동차서비스회사에 침입해 [[도끼]]로 사람을 상해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런 지경에 이르자 서울 시내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경찰은 딱히 치안 회복에 힘을 쓰지 않았다. 사건 이후 '정판사'는 당시 우파 노선을 걷던 [[한국 천주교]]에 불하되어 [[경향신문]]을 인쇄하게 되었다. 해방일보는 무기한 정간으로 사실상 폐간 조치되었다. 미군정은 근택빌딩 5층 산업노동조사소나 4층의 출판사 동우사까지 퇴거시켰다. 동우사나 산업노동조사소는 건물 소유주에게 정당히 비용을 지불하고 입주한 것인데 불합리한 경제적 피해를 보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